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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투자형 사모집합투자기구 / Hedge Fund

Hedge Fund 란?

개인이 모집하는 투자신탁(사모펀드)으로 100명 미만의 투자가들로부터 개별적으로 자금을 모아 ‘파트너십’을 결성한 뒤 자금을 운영하는 투자신탁을 의미한다.

증권과 자산의 집합물을 보유하되, 지분을 공모절차에 의하여 모집하지 않고, 투자회사로서 등록되지 않는 법인

일반적인 펀드와 달리 높은 차입 비율(레버리지)을 떠안고, 관련 법규나 감독기관의 감시 사각지대를 노리며, 소수의 큰 손급 투자자 등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

일반 펀드보다 훨씬 더 큰 차입비중을 가지고 공격적인 투자를 하는 특성상 이 헤지펀드의 대부분은 이미 거대한 자금을 움직이는 초거대 펀드매니저들이 규합해 아직 미개발된 영역에서 엄청난 하이리스크를 떠 안는 대신 그 이상으로 하이리턴을 받을 수 있는 것은 뭐든지 투자한다. 그만큼 한 번에 움직이는 금액이 어마어마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현재는 거대 헤지펀드를 운영하는 매니저들의 결정이 국가의 경제에 큰 영향을 미칠 정도로 성장하였다.

특히 조지 소로스와 같은 ‘글로벌 매크로’ 펀드들은 특정 국가의 경제 변수를 가지고 투자를 하기 때문에 해당 국가의 경제를 휘청거리게 하기 십상이며, 이로 인해 큰 비난을 받기도 한다. 1997년 외환위기를 불러왔던 태국 바트화 폭락 사태는 소로스의 퀀텀펀드에서 바트화를 대량으로 공매도한 것이 시작이었고, 조지 소로스는 영국 파운드화도 공격하여 영란은행을 굴복시키는 등의 위력을 자랑하기도 하였다. 2013년에는 미국의 헤지펀드인 엘리엇 매니지먼트[2]는 채무가 탕감된 아르헨티나의 국채를 탕감 이후에 산 뒤, “나는 아르헨티나의 재무구조 조정에 동의하지 않는다.” 며 빚을 전액으로 갚을 것을 요구하여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이들은 이뿐만 아니라 아르헨티나의 군함까지 압류하는 등 거의 내정간섭 수준의 횡포를 부리고 있어 여간 비난받는 것이 아니다.[3][4] 참고로 저 판결에 동의하지 않고 부채를 상환하지 않는 경우, 미국 시장에서의 모든 거래가 정지된다. 미국 시장 거래가 정지되면, 사실 상 모든 거래가 정지되므로, 아르헨티나는 눈물을 머금고 토해낼 수밖에 없었다.

헤지펀드 역사

최초의 헤지펀드는 1949년 알프레드 윈슬로우 존스(Alfred Winslow Jones)가 운용하였다. 1900년에 태어난 존스는 아버지가 제너럴 일렉트릭 호주점의 중역으로 부유한 금수저 집안이었다. 4살 때 미국으로 이주해서 1923년에 하버드를 졸업 후에 외교관이 되었는데, 1930년대 히틀러 치하 독일에 부영사까지 오를 정도였다. 그러다 아내를 만난 뒤 사회주의 성향을 가지게 되고[5], 그 신념을 바탕으로 1941년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사회학 박사 학위를 얻고 1942년 포춘지에 취직했는데, 재무업계를 취재하다 “뭔가 어설픈 게 많은데….?” 라는 걸 깨달았다고 한다. 기자를 관둔 1949년에 자신의 아이 2명과 자신의 뉴요커스러운 호화생활을 위해 돈을 벌려고 했는데 예전 기자생활 때를 떠올려 직접 펀드를 만들기로 결심하고 친구 4명에게서 6만달러, 자기가 4만달러를 출자해 펀드를 만든게 헤지펀드의 시초다.

존스는 이때 위험을 피했다는 Hedged Fund라는 말을 써서 원치 않게 헤지펀드의 최초 명명자가 되었다. 지금이야 헤지펀드의 수많은 기법이 열리면서 헤지와 관계가 미미해져 이름값을 못하지만, 존스는 이때 당시 아래에도 서술되었듯이 레버리지와 공매도를 섞어 시장에 노출되는 위험을 회피하고도 안정적인 수익을 만들어내는 롱숏전략을 최초로 만들어냈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은 것. 자기도 인정하듯이 그 자신은 투자 선구안이 없었지만, 레버리지로 롱과 쇼트를 동시에 구사해 종목 선구안과 관계없이 (당시만 해도) 거의 모든 종목에서 안전하게 수익을 얻을 수 있는 기법을 최초로 개발해 엄청난 수익을 낸 것이다.

그의 혁신은 여기서 그치지 않아서 ‘시장 전체의 변동’과 ‘개별 종목의 변동’을 구분하고 여기에 시장의 변동률과 종목의 변동률의 퍼센티지를 구해 속도(Velocity)라는 이름을 붙혔다. 놀라운 건 10년도 더 뒤에 별개로 알파와 베타가 등장하는 CAPM가 등장해 재무관리 이론에 일약 혁명을 이루는데, 이걸 알기도 전에 이미 이런 진전을 이룬 것이다!

거기에다 펀드매니저가 거래안을 들고와서 실제로 수익을 냈을 때 인센티브와 성과보수를 부여하는 방안과, 펀드매니저가 자기 자본을 베팅(!)해서 성공했을 때 막대한 수익을 가질 수 있게 한 방안도 존스가 만들어낸 방안이다. 이 방안으로 재능있는 수많은 펀드매니저들이 대부분 존스의 펀드에 몰린 건 안 봐도 비디오다. 재밌는 건 이런 제도적 혁신은 그의 사회주의 성향이 발휘되어 이뤄진 것으로, 사회주의적 사고방식이 반대로 금융자본주의의 거대한 성장의 일익을 담당한 걸 보면 아이러니한 일.

그의 헤지펀드는 20년 넘게 운영되었고, 1968년의 펀드의 종합 수익률은 무려 4800%였다고 한다. 여기까지 보면 알겠지만 아래에 나오는 현대적 헤지펀드의 대부분의 특징을 존스 혼자서 모조리 만들어, 말 그대로 헤지펀드의 아버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지만 존스는 아버지가 되고 싶지 않았는지 반대로 헤지펀드의 존재 자체를 비밀로 붙이는 하나도 안 사회주의적인 정책을 유지했는데, 1964년 헤지펀드 직원들이 “배신”을 해 새로운 헤지펀드를 차리게 되어 헤지펀드의 명성이 월스트리트에 널리 울려퍼지게 되면서, 1966년 자기가 다녔던 포춘이 존스의 말을 인용해 “Hedged Fund”라는 이름을 붙이고 동네방네 홍보하게 된다.[6] 이 기사에서 존스 펀드의 수익률이 당대 최고로 알려졌던 드레이푸스 펀드의 수익을 87% 상회한다는 게 까발려지자 3년간 130개의 헤지펀드가 만들어지는 대펀드시대가 열렸다. 조지 소로스의 첫 번째 펀드가 만들어진 것도 이때.[7]

이후로도 존스는 펀드를 운영하지만 기법이 널리 알려진 헤지펀드의 운명이 다 그렇듯이 수익률은 쪽박을 차게 된다. 나중에 존스는 펀드를 관두고 미국 평화 봉사단(Peace Corps)에 가입해 개발도상국을 발로 뛰어다니면서 도와주다 1989년 세상을 떠난다.

특징

아래에서 서술하는 헤지펀드의 특징은 주로 일반적인 공모 또는 사모 뮤추얼 펀드와의 차이점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또한 집합투자기구의 형태로 보자면 일반적인 펀드는 자산운용사 아래에 펀드 매니저가 독립적인 집합투자기구를 구성하는 형태이나, 헤지펀드는 펀드 자체가 하나의 유한책임회사의 형태로 설립되는데, 이는 조세이전혜택을 위해서이다.

통상적인 집합투자기구에 부과되는 차입 규제를 받지 않아, 높은 수준의 레버리지를 활용 가능함.

운용자에게 운용보수 및 성과보수를 지급함.

분기, 반기 또는 연간으로 정기적 펀드의 매각을 인정함.

펀드 매니저 자신이 고액의 자기 자본을 투자함.

투기적 목적으로 파생상품 투자 및 공매도 가능.

다양한 리스크 또는 복잡한 구조의 상품에 투자함.

접근이 제한되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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